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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대담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읽다가 아퀴나스의 신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완역판 '신학대전'은 십 수권짜리 방대한 분량으로 무식쟁이 나같은 수준으로는 감히 펼쳐보기도 겁나는 터라 아예 포기했고, '신학대전'을 아퀴나스가 직접 요약한 책인 '신학요강'은 한 권짜리다. (그래도 두껍다!) 하지만 그 책 역시 혼자 슬슬 읽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망설이던 차에, 이 책을 발견했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이름하여 "Easy고전" 시리즈 중 하나. 글쓴이는 김상현이라는 이인데, 저자 약력을 보니 무신론자에 칸트를 연구한 이라고 나와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낀 건데, 저자가 무신론자라 아퀴나스의 신학을 오히려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인 듯하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 어렵지도 않으면서 기초지식을 쌓는 데 꽤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 나도 무식한 걸로 치면 고등학생 정도니까)
p.32
서양인들에게는 좋은 것이 곧 선한 것(the good)이다. 이 점에서 선한 것과 좋은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이 같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 후에야 알게 되지만, 서양인들은 선한 것과 좋은 것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생각을 해 본 연후에야 양자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 좋은 것이 선한 것이므로 보다 좋은 것(the better)은 보다 선한 것이며, 가장 좋은 것(the best)은 가장 선한 것이다. 즉 완전한 것이 가장 선한 것이며, 이를 선 그 자체(the good in itself)라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사고방식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흠..좋은 게 다 선한 게 아닌가....난 동양인인걸.서양인들에게는 좋은 것이 곧 선한 것(the good)이다. 이 점에서 선한 것과 좋은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이 같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 후에야 알게 되지만, 서양인들은 선한 것과 좋은 것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생각을 해 본 연후에야 양자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 좋은 것이 선한 것이므로 보다 좋은 것(the better)은 보다 선한 것이며, 가장 좋은 것(the best)은 가장 선한 것이다. 즉 완전한 것이 가장 선한 것이며, 이를 선 그 자체(the good in itself)라고 생각한다.
-신(神)의 영원성 :
불변하고 항상적인 신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겐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 1부 20문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will be forever. Amen.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will be forever. Amen.
p.57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신을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오히려 나를 신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보다 완전해지기 위함이다. ... 따라서 완전한 선은 최후 목적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신을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오히려 나를 신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보다 완전해지기 위함이다. ... 따라서 완전한 선은 최후 목적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p.82 - 예정되어 있지만 계시되지는 않는 이유
만약 아퀴나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신의 안배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 관계없다는 자포자기식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이렇게 인간이 자포자기하도록 안배하지 않았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에게는 필연적 원인과 자유 의지가 구분되고,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있다. ... 인간의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신의 관점에서는 예정되어 있지만, 인간에게는 계시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게으름 피우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부 23문)
만약 아퀴나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신의 안배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 관계없다는 자포자기식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이렇게 인간이 자포자기하도록 안배하지 않았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에게는 필연적 원인과 자유 의지가 구분되고,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있다. ... 인간의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신의 관점에서는 예정되어 있지만, 인간에게는 계시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게으름 피우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부 23문)
p.95
왜 나는 없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다만 아직 왜 있어야만 하는지 그걸 모를 뿐이다. 그것을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 보자. 언젠가는 내가 왜 있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의 목표는 뭔가요?'라는 질문을 했더랬다. 그분이 가져온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 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왜 나는 없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다만 아직 왜 있어야만 하는지 그걸 모를 뿐이다. 그것을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 보자. 언젠가는 내가 왜 있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퀴나스가 신을 이토록 (불경스럽게도 ;)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논한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관한 모든 것을 신앙 입문자 교육에 가장 알맞도록 진술하자 (1부 머리말)'는 데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교리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철학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다보니 문득 이 저자가 정말로 무신론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
마지막으로 책 끝머리 한 구절 더 인용.
p.117
흠. 다시 한 번 <코헬렛>을 떠올리게 된다.신은 완전자이고 이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였다. 세계의 완전성은 이미 실현된, 그래서 정지되어 있고 죽어 있는 완전성이 아니라 실현되어야만 할 완전성이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완전성이다. 역동적 생명성의 동인을 아퀴나스는 역설적이게도 불완전성, 즉 악에서 찾았다. 악을 통해 선에 접근한다. 신을 경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정말로 오묘하고 탁월한 능력의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잡히지 않는 완전한 이상을 위해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 그리고 공포와 사투를 벌여 이겨야 하고 또 그렇게 이긴 후에도 여전히 닥쳐오는 악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허무함을 낳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퀴나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그의 성찰을 발견한다. 인간은, 인류는 허무를 통해서만 낙관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닐까?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놀랐다. 왜냐면..
이제 더 이상 신(神)이란 존재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다고 할까나.
물론 호기심은 여전히 왕성하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하지만 예전 같았으면 뭐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텐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진다.
영적지도 신부님께서 마지막 디렉션 때 "You are changed."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짧은 한 마디가 왠지 나에게 거는 주문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해라~ 얍! 하고.
사실 요즘 이런 종교관련 책들을 찾아 읽는 데에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한 번 시험해보려는 이유도 있었다. 여전히 의심많고 꼬치꼬치 따지려고만 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인지, 아닌지를.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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