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카테고리 중/고등학습
지은이 김상현 (삼성출판사, 2006년)
상세보기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대담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읽다가 아퀴나스의 신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완역판 '신학대전'은 십 수권짜리 방대한 분량으로 무식쟁이 나같은 수준으로는 감히 펼쳐보기도 겁나는 터라 아예 포기했고, '신학대전'을 아퀴나스가 직접 요약한 책인 '신학요강'은 한 권짜리다. (그래도 두껍다!) 하지만 그 책 역시 혼자 슬슬 읽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망설이던 차에, 이 책을 발견했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이름하여 "Easy고전" 시리즈 중 하나. 글쓴이는 김상현이라는 이인데, 저자 약력을 보니 무신론자에 칸트를 연구한 이라고 나와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낀 건데, 저자가 무신론자라 아퀴나스의 신학을 오히려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인 듯하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 어렵지도 않으면서 기초지식을 쌓는 데 꽤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 나도 무식한 걸로 치면 고등학생 정도니까)

p.32
서양인들에게는 좋은 것이 곧 선한 것(the good)이다. 이 점에서 선한 것과 좋은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이 같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 후에야 알게 되지만, 서양인들은 선한 것과 좋은 것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생각을 해 본 연후에야 양자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 좋은 것이 선한 것이므로 보다 좋은 것(the better)은 보다 선한 것이며, 가장 좋은 것(the best)은 가장 선한 것이다. 즉 완전한 것이 가장 선한 것이며, 이를 선 그 자체(the good in itself)라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사고방식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흠..좋은 게 다 선한 게 아닌가....난 동양인인걸.

-신(神)의 영원성 :
불변하고 항상적인 신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겐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 1부 20문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will be forever. Amen.


p.57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신을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오히려 나를 신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보다 완전해지기 위함이다. ... 따라서 완전한 선은 최후 목적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p.82 - 예정되어 있지만 계시되지는 않는 이유
만약 아퀴나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신의 안배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 관계없다는 자포자기식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이렇게 인간이 자포자기하도록 안배하지 않았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에게는 필연적 원인과 자유 의지가 구분되고,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있다. ... 인간의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신의 관점에서는 예정되어 있지만, 인간에게는 계시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게으름 피우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부 23문)
p.95
왜 나는 없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 다만 아직 왜 있어야만 하는지 그걸 모를 뿐이다. 그것을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 보자. 언젠가는 내가 왜 있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의 목표는 뭔가요?'라는 질문을 했더랬다. 그분이 가져온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 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

아퀴나스가 신을 이토록 (불경스럽게도 ;)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논한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관한 모든 것을 신앙 입문자 교육에 가장 알맞도록 진술하자 (1부 머리말)'는 데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교리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철학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다보니 문득 이 저자가 정말로 무신론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

마지막으로 책 끝머리 한 구절 더 인용.
p.117
신은 완전자이고 이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였다. 세계의 완전성은 이미 실현된, 그래서 정지되어 있고 죽어 있는 완전성이 아니라 실현되어야만 할 완전성이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완전성이다. 역동적 생명성의 동인을 아퀴나스는 역설적이게도 불완전성, 즉 악에서 찾았다. 악을 통해 선에 접근한다. 신을 경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정말로 오묘하고 탁월한 능력의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잡히지 않는 완전한 이상을 위해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 그리고 공포와 사투를 벌여 이겨야 하고 또 그렇게 이긴 후에도 여전히 닥쳐오는 악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허무함을 낳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퀴나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그의 성찰을 발견한다. 인간은, 인류는 허무를 통해서만 낙관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닐까?
흠. 다시 한 번 <코헬렛>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놀랐다. 왜냐면..
이제 더 이상 신(神)이란 존재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다고 할까나.
물론 호기심은 여전히 왕성하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하지만 예전 같았으면 뭐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텐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진다.
영적지도 신부님께서 마지막 디렉션 때 "You are changed."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짧은 한 마디가 왠지 나에게 거는 주문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해라~ 얍! 하고.
사실 요즘 이런 종교관련 책들을 찾아 읽는 데에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한 번 시험해보려는 이유도 있었다. 여전히 의심많고 꼬치꼬치 따지려고만 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인지, 아닌지를.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아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인물] 책만 보는 바보

2010/06/03 19:42 | Posted by 별봄이 stargazer
책만 보는 바보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안소영 (보림출판사, 2005년)
상세보기

몇 개월간 내내 영어 책만 버벅대며 읽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한글 책들을 읽으니 숨통이 터지는 것 같다.
이 책이 내가 첫 번째로 고른 책들 중 하나인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흐흐
책을 읽으면서 이 글을 현대판으로 옮겨주신 저자 안소영 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이며 글쓴이인 이덕무는 내 귀에 생소한 이름이었다. 다만 그의 벗들과 스승 중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박지원 등의 이름은 친숙한 이름들이었고. 그 차이는 아마도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인가 아닌가에 따름일 테지. 웃기는 건, 나는 아직까지 박제가 등등의 이름이 친숙할 뿐이지 그들의 책을 읽어본 것도 아니라는 거다. 나는 <발해고>, <열하일기>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고, 홍대용이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저 교과서에 실린 우리나라 '위인'들 중 한 명이라는 것만 기억할 따름이다.
그래서 안소영 님이 고맙다. 책을 읽으면서 교과서 속에서 '위인'이란 이름으로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던 인물들이 뿅뿅 튀어나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비록 어느 정도의 상상이 가미된 글이긴 하지만, 그들도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느낌을 나누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달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덕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거나 위대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며 역사를 만드는 데 일조한 인물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책이다.

p.96
개성과 평양뿐 아니라, 부여와 공주, 경주에서도 그에게는 어김없이 옛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비단 옛 도읍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유득공이 말하기를 자세히 귀 기울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곳에서든 옛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청동기(내 기억이 맞다면) 유적들이 대거 발굴된 지역에 있었다. 실제로 찾아가서 유물들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사실을 안 후부터는, 가끔 야자하다가 쉬는 시간이면 발코니로 나가서 해질무렵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눈 앞의 모든 콘크리트건물들이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탁 트인 초원과 산자락에서는 그 옛날 사람들이 사냥하는 모습, 움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정말 멋진 순간이었다.
비록 지금의 서울은 옛 모습을 거의 잃었지만, 앞으로는 '백탑' 근처를 지나갈 때면 이덕무와 그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만 같다.

p.150
나라가 다르고 말씨가 다르고 옷차림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것을 따지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먼저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같은 나라 사람들과는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고 적다는 이유로, 가진 것이 있고 없다는 이유로, 서로가 속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리부터 사람들 사이에 금을 그어 놓았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중국 선비들의 우정에 대한 글을 보면서 나는 캐나다에서 5개월간 함께 지낸 나의 벗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 달랐고, 나같은 경우는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많았을 테지만, 우리는 어쩜 그렇게 친구처럼 하루하루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까. 물론 종교라는 한 울타리가 우리를 보호해 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모두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의 열린 마음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열고 벗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p.170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연암 선생은 갑자기 부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소 쌀을 씻어 정갈한 다기에다 밥을 지으셨다. 그러고는 흰 주발에 밥을 담아 옥쟁반에 받쳐 내오셨다. 술을 한 잔 권하며 덕담을 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슬기로운 젊은이여, 부디 오래오래 사시게."
박제가는 물론, 나도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무도 대접해주지 않는 데다가 나이도 한참 어린 사람을, 그처럼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편견도 없이, 오직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는 선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선생의 인품이 새삼 우러러보였다.
그동안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전통과 체면만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인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연암 박지원의 이런 성품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덕담을 해주는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찡했다.


책의 후반부에는 정조 대왕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정조와 이덕무를 비롯한 몇몇 뜻있는 신하들의 활약이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제대로 빛을 보지도 못하고 만 것이 못내 아쉽다.
2010. 6. 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종교] 무엇을 믿을 것인가

2010/06/03 16:02 | Posted by 별봄이 stargazer
무엇을 믿을 것인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마르티니 (열린책들, 2003년)
상세보기

가톨릭 공동체 생활을 하다 나와서는,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동안 가졌던 의문점들에 대해 책에서 답을 찾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니네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예전부터 눈여겨 봐오던 것인데,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아서 늘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더랬다. 이제서야 호기심이 생겨 펼쳐보니, 내용인즉슨..
비신앙인 대표 움베르토 에코와 신앙인 대표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의 대담집이다. (교리문답의 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한 이탈리아 월간지의 기획으로 두 사람이 네 가지 주제에 대해 서신 대화를 한 것을 엮은 책인데, 앞의 세 주제에 대해서는 에코가 질문하고 마르티니 추기경이 대답하는 형식이고, 마지막 것은 그 반대이다.
굉장히 얄팍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종일 애써가며 한 권을 다 읽었다. 아마도 주제 자체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박식하기로 소문난 에코가 구사하는 난해한 문장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주제는 성서의 묵시록 해석과 관련된 세속의 강박 관념에 대한 것이다. 에코는 묵시록의 해석에 따른 종말론을 언급하며,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이 공유할 만한 희망의 개념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답변을 하며, 마르티니 추기경은 성서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p.24
...그러나 <묵시록>을 복음서의 빛에 비추어 기독교의 관점에서 읽게 되면, 그 어조와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그것은 현재의 좌절이 투사된 책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품었던 완전성에 대한 희망, 달리 말해서 구원을 향한 희망의 연장선에 놓인 책이 됩니다. 믿는 사람의 희망에 대항할 수 있는 인간이나 사탄의 권능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영적 지도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어느날 내가 <코헬렛>을 읽었는데, 그야말로 허무함의 극치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물론 코헬렛은 극도의 허무주의자이긴 하지. 그렇지만 성서의 한 부분인 <코헬렛>에서 느낀 그 허무함과 의문점들에 대한 답은 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읽음으로써 찾게 되는 거야.'

그리고, 에코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마르티니 추기경은 말한다.
p.26
...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생각할 줄 알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뿌리를 대고 있는 깊은 토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토양에 똑같은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
전반적인 추기경의 대답들은 모두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확답을 주기 보다는..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부분 하나 더.
p.28
만일 널리 인정되고 존중되는 어떤 최종적인 가치와 관련해서 현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책임성 있는 선택과 지혜로운 행위를 통해서 그 가치를 앞당길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고통스럽지 않게 반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사람은 개선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에 대해서만 잘못을 뉘우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그렇다면, 교회의 교리에 따른다면, 비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인가.


세 번째 주제에 관해서.
에코답게 장황하게 글을 늘어놨지만,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사제직을 금하는 교의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이건 나도 궁금했었던 문제였고.
그런데 그 답변글의 제목이 '교회는 기다림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비를 찬양한다'여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뭔 소릴까나.
답변의 핵심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러하다.
p.84
교회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고, 2천 년의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사실상 예외라 불릴 만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그 교회의 실천은 추상적인 논거나 선험적인 이유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비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어떤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오로지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부여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거들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제시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실천은 꿋꿋하게 영속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한낱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구원의 사건들에 불충실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열망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자기를 낳아 준 구원의 사건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그 사건들에 언제나 충실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 추기경은 '결국 교회는 자기가 경험하고 찬양하는 신비들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흠..이건 내 짧은 생각이지만, 훗날 교회가 여성 사제를 인정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여성계를 비롯한 사회세력의 비판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신비'에 기인한 것일 테다.

마지막 네 번째 주제에 관해서는...
그냥 두 편지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라고 물었고, 에코는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라고 대답했다. 
이상 끝.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궁금해졌다. 우선 가벼운 책부터 건드려볼까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인문/수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2010/06/01 19:37 | Posted by 별봄이 stargazer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윤성근 (이매진, 2009년)
상세보기

캐나다 시골에 몇 개월간 은둔(!)하던 중, 한국의 친구로부터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그 친구가 보낸 책들 중 한 권.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엔 도통 틈이 안 나서 못 읽고 있다가 거길 떠난 후, 몬트리올 여행 중에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 터미널에 앉아서는 홀딱 다 읽어버렸더랬다.
간만에 읽은 한글 책이어서 더 속도가 붙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별로 심각하게 어려운 책도 아니니까.
쓴 사람이 부담없이 써서 그런건지(뼈를 깎는 고통으로 심혈을 기울여 쓰셨다면 죄송하지만..글쎄..) 읽는 나도 부담없이 읽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헌책방이란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던 터라, 더욱 흥미가 가는 구석이 있고. '내가 읽고, 권하고 싶은 책만 판다'는 취지가 매우 신선해 보인다. 사실 그간 여러 헌책방을 구경해보면서 좋은 책, 쓰레기같은 책들이 한자리에 마구잡이로 꽂혀있는 걸 보며 '이건 어쩔 수 없는 헌책방의 운명인가'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그 많은 책 더미 속에 숨어있는 귀한 책을 골라내는 것 또한 헌책방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내가 늘 들락거리는 길담서원 역시 서원지기님의 선별(혹은 취향 ㅋㅋ)에 따른 맛깔난 인문, 사회 관련 책들만 모아놓고 파는 곳이라서, 이 책을 읽으며 길담도 떠올렸었다. 실제로 나는 길담에다 헌책도 다루자고 제안해서 조그만 헌책코너가 생겼고, 지금도 길담 한 구석에 헌책들이 꽁꽁 한데 모여있다. 다만 기증받은 헌책들이라 선별된 것이 아니어서 아직 활성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헌책'이면서도 '선별'된 책만 팔겠다는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싶다. 마침 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내가 새로 이사온 동네랑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조만간 슬쩍 들러볼 참이다. 백수 처지에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는 동네도서관. 동네 헌책방과 친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지니.
2010. 6. 1.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미국/동화] 시간 상자

2009/11/18 22:44 | Posted by 별봄이 stargazer
시간 상자
카테고리 유아
지은이 데이비드 위스너 (베틀북, 2007년)
상세보기

글 한 자 없는 그림책이 이렇게도 멋진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다. 동화책이나 그림책은 두 아이의 엄마인 우리 언니 덕분에 가끔 보게 되는데, 어쩜 그렇게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책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 때에도 그런 책들을 많이 읽었더라면 정신적으로 참 풍요로웠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언니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한 소년이 바닷가에서 우연히 떠내려온 카메라상자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이런 하찮은 글로 그 아름다운 그림을 표현하기가 민망하다.
그저 직접 그림을 보며 느끼는 것이 제일.
2009. 11. 18.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전 1 2 3 4 5 ... 14 다음